깨어진 날계란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과연 이 계란 한 알이 현 시국에 던지는 함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필명 G.J. , 익명의 구독자로부터의 기고문입니다.

갓 생명체가 된 병아리들도 깨고 나오는 얇은 달걀 껍질 속에 진득한 액체는 참다 참다 머리를 깨고 나와 흘러내리는 분노를 닮았다. 계란은 작다. 가볍고, 연약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때때로 무겁고, 격렬하다.

 12.3 계엄 이후 우리나라는 정치적인 격변기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고 때때로 나라를 위해 뜨겁게 눈물 흘린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혹자는 빨강과 파랑으로 나뉘어져 목에 핏대 올리는 사람들을 향해 ‘정치병자’ 라며 혐오로 점철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한 명의 엄마이자 아빠이고 아들 딸일 뿐이다.

계엄 직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였듯이, 미디어로 잘못 포장된 윤석열 대통령의 이미지와 함께 지지율이 17%까지 떨어졌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20년 이상의 검사 경력에 검찰 총장까지 한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 이렇게 무기력한 계엄을 선포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국회에 온 군인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임무를 수행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폭력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콧구멍을 벌렁대며 라이브 방송을 하거나 담을 넘는 장면을 찍어 미디어에 내보냈다. ‘진짜’ 계엄 상황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계엄을 처음 겪는 나라도 아닌데 250명이라는 조촐한 숫자로 국회를 장악할 수 없었다는 것을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 우리는 대통령의 절절한 대국민 담화에 귀를 기울이다 점점 진실에 눈을 뜨게 됐다.

역사상 유래 없는 탄핵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전임 정부의 선례를 찾아보아도 30번에 가까운 탄핵을 시도한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한 행정부 마비를 시도한 것이다. 부정일지도 모르는 선거로 190석을 차지한 거대 야당은 178번의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정권 찬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왔다. 우리나라를 중국에 내어주는 악법을 끊임없이 발의했으며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서서히 우리나라에 스민 반국가세력에게 국민 주권을 내어주고 그들을 떠받들게 만들었다. 언론, 법조계 등 사회 곳곳의 주요한 곳마다 간첩을 배치하고 나라를 좀먹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그 대가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렸다. 조선, 철강,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은 거의 다 중국에게 따라잡혔으며, 대통령의 항공모함을 촬영하거나 군사시설을 촬영해도 간첩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간첩법 개정을 반대하는 거대 야당 때문이다.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미 중국에 빼앗겨버린 홍콩의 말로를 답습하고 있다. 정치에 지쳐버린 우리 국민들에게 눈 뜨고 귀 열라고 악착같이 소리지른 윤석열 대통령이 없었다면 벌써 이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중국의 속국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최근 경북 지역의 산불이 크게 번지면서 누가 재해 예비비를 삭감했느냐를 두고 날 선 공방이 벌어졌다. 야당은 각 부처 재난대책비 9,700억과 예비비 2.4조원, 국고채무부담 1.5조원이 있다며 도대체 이 돈을 아껴서 누구 주머니를 불리려는 것이냐고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중 4,170억은 지난해 발생한 재해 관련 2년차 복구비이며 농식품부와 해수부의 재해대책비는 사회재난에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예비비 중 1.2 조원은 이미 고교무상교육과 5세 무상교육에 지정되어 있고 나머지 금액은 국가 안보를 위해 정보 예산만 남은 상황이라 재난 대응에 쓸 수 없다. 국고채무부담은 단어에서도 보이듯이 외상을 하자는 의미다. 결국 가용할 수 있는 예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야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 아닌 거짓말은 알고 그런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수행원들이 써주는 대로 읽은 것일까? 거대 야당의 대표이기에 전자든 후자든 참담한 심정이지만 차라리 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윤석렬 대통령을 파면하기 위해 마은혁 재판관을 임명하면 산불 수습을 지원하겠다는 박찬대 의원의 말을 들으며 실낱 같은 희망마저 없어졌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이러한 상황에 가슴이 답답하고 울컥하는 날이 많아졌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는 심심찮게 한국인이 중국인 조선족에게 폭행당하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경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보고 울부짖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제주도는 이미 중국인들의 강력 범죄로 인해 흉흉해졌고 대림에서는 한국어 간판을 찾아보기 힘들며 화교라면 어린이집 특혜, 의대 입학 특혜, 부동산 혜택과 건강 보험 혜택까지 한국인이 힘들게 번 돈맛을 중국인이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런데도 계엄은 너무하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자녀가 중국인의 노예로 살아가길 바란다는 말과 다름없다. 게다가 미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트럼프는 ‘미국이 강간당했다’는 거친 표현을 사용했다. 그 말에 나 또한 동의하는 바다. 5000년의 숭고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어떠한 위기에도 우수한 국민성으로 끈질기게 극복해온 우리 국민을, 반국가세력이 강간하고 있다.

또한, 자유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마저 부정으로 의심받고 있다. 형상기억종이, cctv 유출 등 수많은 부정선거 의심자료가 떠오르지만 언론은 음모론이라고 말하며 부정선거를 검증하라는 국민을 정신병자 취급했다. 심지어 법관들이 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소속된 선거관리위원회가 외부 감사를 받지 못하도록 ‘감사 불가’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상 셀프 면죄부에 해당한다.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선관위는 내부 회계와 운영에 대해 감사원의 감사를 거부해왔고, 최근 법원은 이 입장을 지지하며 ‘의혹이 있어도 감사를 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국민의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면서도 국민의 감시와 견제는 거부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감사는 국민의 알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인데 그마저 법원이 봉쇄한 셈이다.

우리는 계란을 맞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뉴스와 신문, 인터넷 영상으로 종종 봐왔다. 당시엔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계란을 맞은 그들은 당황했고, 무안해했으며, 적어도 겸허한 태도를 보이려 했다. 그게 진심이든 연기든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정치인은 안다. 국민의 분노가 손에 들려 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이물질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표상이란 걸. 계란 한 알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응축돼 있다. 실망, 분노, 체념, 그리고 마지막 기대. ‘이 계란이라도 맞고 당신이 조금은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절박한 신호다.

사람들이 분노의 대상에게 계란을 던지는 것은 그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고, 항의해도 바뀌지 않으며, 참아도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국민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의 몸짓이다.

폭력이 아니다.

조롱도 아니다.

말 대신 선택한, 가장 연약한 저항의 상징. 그것이 바로 날달걀이다.

그런데 이번, 민주당 의원에게 날아간 계란 이후 반응은 충격이자 공포였다. 그 배후가 누구든 간에, 계란을 던진 국민을 가리켜 체포하라고 요구하고, 항의하는 국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분노의 대상을 ‘국민’이 아닌 ‘범죄자’로 몰아갔다.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눈빛엔 노골적인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한테 계란 맞을 사람이냐’고. 국민의 소리를 듣기보단, 그 소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억압하려는 태도.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권위주의고, 위선이다.

더 기가 막힌 건, 한 어르신이 ‘불 좀 꺼달라’고 외친 평범한 외침조차 민주당 측에서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했다. 한겨울 추위에 이재민이 떨고 있는데 거기서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는 정치인. 국민을 향해 ‘저거’라는 표현을 쓰는 정치인. 그들이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이 아닌 그저 ‘대상’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란 한 알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정치, 분노조차 억압하려는 권력, 민심의 외침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 그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벌레일 뿐이다.

정치란 국민의 뜻을 듣고, 그 뜻 앞에 무릎 꿇는 일이다. 계란을 맞고도 고개를 들 수 있는 정치인은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 국민의 분노를 범죄로 취급하는 사람은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을 고소하는 순간, 그는 이미 국민의 대표가 아닌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된다.

날달걀은 국민이 할 수 있는 가장 연약하고 처절한 저항이다.

그 사실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떤 정치인인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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