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주변에는 좌파가 많다. 현재 거주 중인 미국 지역도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곳이며, 한국에 있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대학교, 고등학교 친구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전원이 좌파였고 민주당 지지자였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절, 이상하다는 기분을 처음 느낀 시점은 대학 졸업 직후였다.
원래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던 단톡방이 어느 순간 박근혜 대통령 비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동시에 현대, 기아, 삼성 등 대기업에 대한 혐오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고, 분위기를 고려해 발언을 삼갔다.
단톡방 참여자 중 일부는 피해의식이나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태도를 보였고, 대화가 이성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조짐이 있었다. 좌파 성향의 뮤지션을 추천하고, ‘미제’, ‘프롤레타리아’ 같은 단어를 유희처럼 소비하던 이들. 그중 중심에 있던 인물은 화교였고, 반미·친중 성향 게시물을 열심히 공유하던 이는 전라도 출신 강성노조 가정 출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때 가까웠던 이들과는 30대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국에 휴가를 가도 연락은커녕 만나지도 않았다. 몇 년 전, 드물게 귀국했을 때 이 소식이 전해졌고, 모임 요청이 쏟아졌다. 정치 성향 차이는 있었지만, 어릴 적 함께한 추억을 고려해 필자는 세 시간 운전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모임 참석자들은 ‘경쟁은 나쁘다’는 주장으로 토론 중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토론이 아니라 합창에 가까웠다. 서로 경쟁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필자는 정치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힌 적 없지만, 대화와 행동을 통해 충분히 인지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자녀를 경쟁 없이 키우겠다는 계획을 나열했다. 산속에서 키우겠다, 농촌에 정착하겠다, 아예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아이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후 필자에게 의견을 요구했다.

“필자는 경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가 경쟁에서 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상대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참고로, 이 자리에 있던 전원은 미혼이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들도 자식을 직접 키우게 되면 지금 같은 발언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좌파들도 자녀가 남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인간의 모순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후 필자를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 조롱했고, 결국 ‘2찍’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극우라고 비난하는 대상에게 감정 토로를 한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그날 술자리는 ‘왜 인간은 평등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필자의 강연으로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취한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발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날 다시 확인한 사실은, 이들에게 이성과 논리가 더 이상 설득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입시와 사회생활에서 느낀 상대적 박탈감을 엘리트-비엘리트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반복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들에게 필자는 불편한 존재다.
20대부터 쌓여온 감정의 결과일 것이다. 지금은 학벌이 큰 의미를 갖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거슬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필자는 후손에게 경쟁을 권장할 것이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환경에는 필자 같은 존재가 없다.
그들이 겪는 분노는 낯선 존재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점차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향하고 있다. 정상보다 비정상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그날 많은 친구를 잃었지만, 필자의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좌파와 거리를 두며 마음이 편안해졌고, 향후 삶에 대한 방향성도 더 명확해졌다.

신념이 종교가 되어버린 사람은 설득이 불가능하다.
아직 종교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완전히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변화 가능성이 있다.

가족이 좌파인 경우는 더 복잡하다. 이때는 오랜 시간에 걸친 설득과 실천이 필요하다.
부모가 좌파라면, 자신이 우파 사상 아래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그것을 실증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방법이 없다는 표현은 이미 독자들이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해봤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에 몇 차례 노출되면 변화한다. 하지만 다수 노출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감화’라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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